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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Holiday in AU/1. 시드니

[워킹홀리데이 D+73] 완벽하지 않은 나도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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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Holiday

D+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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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018


D+73, 08/11

새벽에 자다가 배가 너무 아프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잠깐 깼다.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한참을 끙끙대다가 다시 잠에 취했는데 알고보니 생리가 시작된 거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갔다가 "아이..씨"를 작게 읊조리는 기분은 정말...


나는 생리통과 함께 음식을 보면 구역감을 느낀다.

이미 오늘 밥 먹기는 그른 것 같고 진통제 두 알과 따뜻한 소금물을 먹고 누웠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는 멍하고 관절 마디마디가 고장난 것 같고,

왜 이런 상태로 한 달의 중요한 2-3일을 낭비해야 하는 건지 억울하고 짜증난다.


그래도 진통제 2알을 먹고 나니 거동이 가능해져서 짐을 챙겨서 카페로 향했다.

진통제가 개발되고 상용화 된 뒤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날 누워있기만 하면 더 기분이 축축 쳐져 내릴 것 같아서ㅡ

오랜만에 온 @Q on the harris

근데 평소에 자주 보던 알바생이 사라졌다.

나름 단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사도 없이 누군가가 떠났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운하네.

호르몬 때문에 그런거다.

난 이런 걸로 쉽게 속상해하지 않아.

하지만 미리 인사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걸.

콜드 드립을 한 잔 마신 후

어제 마신 블랙티에 우유가 생각나서 시켰다.


최근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혼자 있을 때 혼자 즐길 무언가를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둑>을 배워보면 어떨까.. 싶어서 가연이네 오빠한테 기본서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세돌씨가 쓴 책을 추천하시길래 리디북스에 쳤더니 한 권 나오길래 가연이한테


"어린이 어쩌구 저쩌구 맞아?"

"잠만 물어볼게, 응 맞대~"

"알겠어! 나 결제한다!"


결제 후 본격적으로 읽어보려는데...

.

.

....?

??????????

??????

??...

............

ㅜ?

.

.


카페에서 보다가 현타와서 덮었다..

알고보니 경도니씨가 추천한 책은 다른 책이었다.

짜증난다.

사기꾼 남매.

.

.

오늘 레스토랑에 30분 일찍 출근했다.

오후-저녁을 테이크 오버 하기 힘들어서 사장님이 부탁하신 건데

뭐랄까- 오늘 나는 좀 멍청한 상태다.

혜영언니가 가끔씩 "바보상태가 되어버렸어-"라고 할 때가 있었는데

오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지금 바보다.


오늘 출근 하자마자 간장 뚜껑 깨먹고, 1시간 뒤에 컵 하나 깨먹고, 추가 주문 한 테이블 넣는 거 다 까먹고, 뭐든 떨구고 다니고...

사장님이 집에 가는 길에 사고 조심하라고 할 정도로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처럼 있었다.

다행히 추가 주문 까먹은 테이블에 미안하다고 하니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말라고 바로 말해줘서 고마웠다.

주방에 말하니 음식을 바로 바로 빠르게 빼 준 셰프들도 고마웠고 마지막에 "다음 주에 정신차리고 올게요~"라고 인사했는데

"오늘 너무 잘했어~"라고 위로해주신 것도 고마웠다.

안나한테도 "이상해요 오늘 다 안 풀리는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안나도 "괜찮아, 그런 날이 있더라고~"라고 말해주셔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일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오지를 않고 손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서 기운을 북돋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퇴근 후에 버스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꾹 참으면서 왔다.

다 잘하고 싶었는데 이게 내 한계인가 싶기도 하고,

호주에서 알게 모르게 하고싶던 말들을 못했던 것들이 속상했는지 울컥울컥 올라오기도 하고,

나도 한국에서는 잘 말하고 잘 따지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선 이게 최선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친듯이 노력하지 않는 내가 참 미운 순간이었다.


살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지ㅡ 라고 한 10번 정도 곱씹으니깐 나아졌다.

그래, 살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지.

매일 완벽 할 수는 없지.

이제까지 잘 해왔으니깐 다시 잘하면 돼.


그리고 오늘 저녁밥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불닭볶음면.

내 돈 주고 안 사먹는 음식 중에 하나인데,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이런 거 보면 나도 참 한국인이구나 싶다.

매운 걸로 스트레스 푸는 거.


내가 만들고 있으니깐 나올린이 "이거 삼양라면이야? 나 이거 유투버들이 먹는 거 엄청 많이 봤는데!"하길래

같이 먹을래?라고 했다가 니콜도 나와서 맛보고 결국 절반은 뺏겼다.

그래도 나올린이 엄청 매워하면서도 "진짜 맛있는데 진짜 맵다-!"하니깐 괜히 뿌듯했다.

맞아, 맛있게 매워서 다들 그렇게 먹어대는 거야.


오늘 너무 힘든 하루였기에 엄마에게 둥이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럴 때 보면 나도 말을 할 수 있고 모든 걸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가연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늘 고맙지만

그래도 난 오빠도 있고 동생도 있는 가연이가 늘 부럽다.


그래서 그런지 가연이 옆에 있으면 괜히 혼자 잘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일부러 징징대고 일부러 투정도 부리고, 같이 살 때도 늘 그랬던 것 같다.

가연은 왠지 모르지만 그게 좋다고 했다.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여튼 이런 거 보면 인연은 존재하는 것 같다.

내 생에 연인으로 만나는 인연은 극히 적거나 이미 끝났을 지라도

좋은 친구들과 좋은 사람들로 채운 인연이 참 많고, 앞으로도 많을 것 같다.


오늘도 실수해서 잘 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도 딱 저만큼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부족한 나, 실수하는 나, 남에게 상처를 줘버린 나,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한 나,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나 등등

나를 미워할 수 있는 이유는 참 많지만

그런 완벽하지 않은 나도 사랑할 수 있는 나라면 좋겠다.


미성숙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Perfectly Imper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