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 최은영 / 문학동네 / 2016년 11월의 독후감
뭐 하나를 잠깐 손대도 실수하고, 그 실수가 평소 같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어처구니없는 일임에 기함한다. 그럴 땐 주변인에게 느끼는 미안함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를 향한 모멸감과 자괴감이 스믈스믈 피어오른다.
‘왜 나는 이정도 사람일 수밖에 없을까’하는 생각들.
보통 이런 날들은 하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4-7일 정도 지속되곤 하여서 크고 작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습할 마음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무자비한 날들이다.
한참 그러던 때에 독서모임에 올라온 책이 <쇼코의 미소>였다. 제목만 봐서는 일어 번역체가 가득담긴 일본소설인 줄 알았다. 그 당시엔 마음에 여유가 없어 우선 핸드폰 e-book에 다운 받는 것으로 다이어리에 적힌 해야 할 일을 하나라도 지웠다는 안도감에 빠져드는 것이 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정돈될 것이고 좋은 일만 생기는 전환점이 올 거라고 믿었고 그때가 오면, 상황이 나아지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다린 후에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 때 마음이 아팠다. 감기처럼 찾아오는 삶에 대한 회의감을 어떻게 몰아내야할지 몰랐고 늘 겪으면서도 늘 아팠다. 마음이 답답하고 삶이 답답해 한참 운동장을 숨이 가쁘게 뛰었고, 지쳤고, 벤치에 앉았고, 그렇게 <쇼코의 미소>를 열어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의사에서 진료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색의 이야기들이 내게 질문했다. 그 때, 어땠었냐고. 이어지는 질문을 받은 후 나는 마지막 질문에서 무너졌다. 마지막 단편소설인 <비밀>은 카페에서 카페모카 한 잔과 함께 읽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에게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혼이 났다. 일곱 타래의 소중한 사람들, 기억들에 이어지는 마지막 줄기는 나를 너무나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던 할머니에 대한 얘기였다.
나의 할머니도 책 속 지민의 할머니처럼 나를 참 사랑하셨다. 사랑했다는 말로 뭉뚱그리기엔 너무 단단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딸 하나 낳은 엄마에게 동네사람들이 면박을 주었을 때도 할머니는 손수 나서서 아기는 남자든 여자든 다 소중하고 예쁘다며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했던 것을 엄마는 이따금 말하곤 하셨다. 어린 내가 번데기를 사다드리다 티가 나게 많이 주워 먹은 후 아닌 척 드렸을 때도 할머니는 자신을 생각해줘서 고맙다며 내 머리를 몇 번이곤 쓰다듬으셨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마다 교복만큼은 자신이 맞춰주고 싶다며 굳이 엄마에게 돈을 보내셨다. 대학 방학시절 간 여행에서 돈이 부족해 한 곽에 만원 정도하는, 별로 비싸지도 않은 터키 과자를 여행선물로 건네었을 때도 나의 할머니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셨다. 떠올려보면 나는 이 생에 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1년여 전, 췌장암 말기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날, 가장 독한 진통제를 맞고 말도 제대로 하실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찍어 박던 할머니는 분명 내게 마지막인사를 남기신 거라고, 나를 알아보신 거라고 믿고 있다. 그녀가 내게 남긴 흔적들은 나의 삶에 이어지는 수많은 인연들, 기억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후회들을 안고 살아갈 용기를 준다.
늘 그렇듯 언젠간 또 나에게 철을 모르는 감기가 찾아오겠지만 나는 이 마지막 <비밀>이라는 단편소설을 끝으로 2016년 11월의 짧은 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