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 앨리스 / 2016년 9월의 독후감
무덥디 더운 여름의 끝물이다. 아니 이미 끝나버렸는지도 모른다. 에어컨을 껐다켰다 시종일관 못살게 굴던 일과도 끝이 났고 한쪽 구석에 넣어둔 긴팔잠옷도 夏眠을 끝냈다. 아마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이 왔나보다.
“빛이 사위고 그림자가 깊어지면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는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그림이 남는다.” (54p)
겨울에 가까이 갈수록 해는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진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퇴장하고 단순한 진실들만 남는 순간이 길어진다. 이 책에서 얻은 나의 위안이다. 쉽게 추워하는 나의 손끝을 꼭 잡아주던 해가 짧아지고 나면 시리는 그 곳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견뎌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조각이었으면.
책을 넘기는 동안 누군가의 영혼을 맛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깊고 진하고 달고 짠 잘 구워진 영혼의 일부. 타고난 이과성향을 가진 나는 이렇게 잘 써진 작품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이 불쑥 치고 올라오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이 부러움은 가끔 못난 모습으로 변형되기도 해서 너-무 잘 쓴 책을 보면 괜히 심통이 나 확 덮어버리기도 하는데 이 책의 사포질 같은 문장들이 나를 곱게 마무리 짓는다.
책의 작가들은 몇 시간을 꿈쩍 않고 붓질을 해댄다. 나 또한 기꺼이 내 영혼을 녹여 바를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기를 늘 바랬다. 목맬 수 있는 무언가가 내 앞에 떡하니 떨어지기를 꿈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을 매기에는 나는 늘 숨이 고프고 숨이 아쉬운 사람인가보다. 한 숨이라도 더 삼켜보려 하는 사람.
어쩐지 나는 영원히 나의 결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