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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Book Review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 마르탱 파주 / 열림원 / 2016년 8월의 독후감


 내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들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등에 있는 왕점,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식성, 풍선에 바람 빠지듯 지치는 체력 그리고 비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비를 찬양하고 사랑하고 분석하고 이입하는 작가의 글 속에서 나는 예전 기억들을 타래처럼 꺼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학교가 가기 싫던 어느 날은 평소 자주 찾아오던 어지럼증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서 등교시간이 다 되도록 억지로 일어나지를 않았다. 지금 안 일어나면 정말 지각이다,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누워있으면 되니, 학교 갔다가 아프면 돌아오라는 말을 거쳐 엄마의 입에서 나는 모르겠다. 네가 선생님께 연락드려라가 나올 때까지 징하게 잘 버텨낸 나는 간신히 살아있는 목소리로 선생님께 병가를 알리고 푹 누워있었다. 피곤했던 몸이 긴장을 탁 푸니 부족했던 잠이 그 사이로 쏟아졌고 마디마다 스몄다. 그렇게 한참을 자던 나는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참 시원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뿐히 일어나 아빠의 품 넓은 바람막이를 입은 뒤 맨발로 운동화를 신은 나는 어딜 가느냐는 엄마의 질문에 비 맞으러!”라고 했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날의 비는 참 달았다. 다른 이들의 등교시간, 출근시간이 한참 지난 거리는 차도 사람도 드물었고 이미 쫄딱 젖기로 작정하고 나온 나는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물웅덩이마다 일부러 밟고 다녔고 젖은 벤치에도 덥석덥석 앉았다. 비를 잔뜩 머금은 나뭇잎을 만지고 덤불을 만져 빗방울이 손가락을 지나 팔을 타고 옷 속 겨드랑이를 간질여도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안경을 쉼 없이 때리는 빗방울에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희미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며 흐릿해서 더 아름답다는 생각도 해봤다가 근데 이 비 맞아도 되는 건가?’싶었다가 숱 많은 나의 머리를 믿어보기로 했다가 쏟아지는 빗방울에 입 벌려 맛을 보았다. (물론 건강엔 해롭겠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나에게 달라붙은 온 옷가지를 훌렁훌렁 벗어던진 뒤 했던 목욕은 최고였다.

나는 아직도 그 기억을 에 대한 가장 최고의 순간으로 여긴다. 누가 나에게 비 좋아해요?’라고 물어도 좀 찝찝하긴 한데 좋아해요라며 대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며 쏟아지는 비를 보고 주인 없는 나무들이 목을 축이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고 세상이 씻겨지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시작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닐까. 소중하고 반짝이는 기억을 중심으로 호감이나 사랑, 걱정, 회상, 가끔은 조그마한 원망들의 살을 붙여나가며 점차 내 안에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고 사랑이라면 언젠가 나도 이 책처럼 막연한 사랑과 찬양을 속삭이는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